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연안 이씨 (문단 편집) === 조선 === * 이귀령 - 자는 수지, 호는 계은, 시호는 강호다. 전공판서 이원발의 아들이며 [[고려]] 말에 판선공시사 등을 지냈다. 동생인 이귀산과 함께 [[태조(조선)|태조]]와 [[조선]]이 세워지기 전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하며, [[태조(조선)|태조]]가 즉위하자 개국원종공신이 되어 형조전서 등을 지냈고, [[태종(조선)|태종]] 때 판공안부사와 판승녕부사, 판좌군도총제부사 등을 지내다 판한성부사가 되었다. 이후 검교우의정, 검교좌의정에 올랐는데 [[태종(조선)|태종]] 16년에 좌의정으로 [[치사#致仕]]하였다. 94세 나이로 졸하였다. 여담으로 이귀령의 둘째 아들인 이돈이 [[조선]] 최대의 음부(淫婦)인 유감동과 간통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는데, 이돈은 유감동의 죄상을 알면서도 안연하게 간통하면서 그의 아버지인 검한성 유귀수의 집까지 드나들었다고 한다. 이에 [[사헌부]]는 강력한 처벌을 요구하였으나 공신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벌에서 면죄되었다. * 이귀산 - 자는 흥서, 호는 괴은이다. 봉익대부 전공판서 이원발의 아들이며 좌의정치사 이귀령의 동생이다. 도호부사 [[이속(조선)|이속]]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전라도관찰사와 경성수보도감 제조, 경상도관찰사, 개성부유후, 강원도관찰사를 지냈다. 전라도관찰사로 재직 당시 [[사헌부]]에서 이귀산이 찬성사 [[이천우]]에게 뇌물을 주었다고 탄핵하니 [[태종(조선)|태종]]은 이를 논하지 말라고 명하였다. 또한 [[태종(조선)|태종]]이 이귀산에게 경상도관찰사를 제수하였을 때 [[사헌부]]에서 이귀산은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라고 상소하여 [[경상도]]에 가지도 않고 파직되었다. 이후 자헌대부 호조판서와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고령현부인 [[고령 김씨]] 사이에서 [[이속(조선)|이속]]을 낳았으며, 장인은 문하평리, 예부상서, 판개성부사 등을 지낸 익대공신 고양부원군 김남득이다. 이귀산은 만년(晩年)에 [[용인시|용인]] 구수동으로 물러나 두 그루의 괴목을 심고 스스로 괴은(槐隱)이라 하고, 삿갓을 쓰고 밭을 갈며 강가에서 낚시하며 보냈다고 전해진다. [[진안군|진안]] 이산묘 영모사에 배향되었으며, [[경기도]] [[용인시]] 처인구 이동면 서리에 묘소가 있었으나, 골프장 건설을 위해 파묘하였다.[* 이에 태자첨사공파 선조의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서 [[동양]] 최대 규모에 준하는 연화사(물론 연화사보다 규모가 큰 사당이 존재하나 개인 집단이 만든 사당으로는 매우 큰 규모인 것은 확실하다) 철거 문제 등과 관련하여 분쟁이 계속되고 있다. [[https://youtu.be/nMwlaqGmtow|해당 관련 영상]] [[http://www.gukje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1156511|해당 관련 기사]]] 묘갈은 1831년에 다시 세워졌으며, 비문은 19세손 가선대부 전 궁내부특진관 이의덕[* 가선대부 궁내부특진관을 지냈다고 하며, [[성균관]] 명륜당 옆 99칸의 집에서 살았다고 한다.]이 짓고, 17세 방손 통훈대부 전 중추원의관 이병욱이 썼다. * 이장림 - 1378년에 충의교위 [[평안도]] 신성군영 천호 이조의 아들로 태어났다. 조부는 문하평리 이승백이다. 본인은 문과에 합격하여 자헌대부 병조전서를 지냈다. 부인은 문하시중 [[이인임]]의 장녀 [[성주 이씨]]다. 슬하에 아들 이보를 두었는데, 이보는 현재 후손이 전하지 않는다. * 이석형 - 자는 백옥, 호는 저헌, 시호는 문강, 4등 좌리공신으로 연성부원군이다. 태종원종공신 증좌의정 이회림의 아들이며, 조부는 개국원종공신으로 좌찬성에 증직된 이종무이다. 배위는 정경부인 [[연일 정씨]]로 [[정몽주]]의 증손녀이다. 연원군 이숭원과 같이 대표적인 [[훈구파]]였으며, [[세종(조선)|세종]] 때 생원시, 진사시, 식년문을 27세의 나이로 1년에 세 번 장원하였다. 1년에 삼장원 한 일은 [[과거 제도]]를 실사한 이래 없었던 일이다.[*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면 처음엔 종6품 관직에 제수된다. 그러나 이석형은 [[조선]]에서 유일하게 정6품에 제수되는 특별한 혜택을 받았다.] 이에 훗날 [[세조(조선)|세조]]가 궁녀에게 삼장원가를 짓게 하여 술을 마실 때 마다 부르게 했다.[* 이 때 부르던 삼장원가의 가사가 전해진다. 다음은 삼장원사의 가사이다. [br]< 삼장원사 (三壯元詞) >[br]三壯元詞九天上 (삼장원을 치하하는 구천에서 위에서)[br]三壯元臣拜稽首 (삼장원한 신하 머리 숙여 절을 올리네)[br]臣名九皐風徹響 (구고에 떨친 신하의 명성 바람타고 사무치는데)[br]臣身一毛不自有 (신의 몸은 털끝 하나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네)[br]王曰來汝文章骨 (임금께서 이르시네 옳아! 그대, 타고난 문장이로다.)[br]設我竹아래邊豆崇我酒 (내 그대 위해 변두를 차리고 술을 가득 채웠노라)[br]居然敎坊新門안祭出 (교방에서는 재빠르게 새곡조 만들어 내니)[br]宮娥信口歌以侑 (궁녀들 멋들어지게 노래하네)[br]歌聲淸切上蒼蒼 (청아한 노래소리 창창하게 들려오니)[br]紫皇廳之咨嗟久 (자황께서 들으시고 찬탄 마지 않으시네)[br]方丈蓬萊一時遍 (방장산과 봉래산을 일시에 두루 거닐은 듯)[br]五色雲間鸞鶴逗 (오색 구름 사이 사이 난학이 깃들인 듯)[br]瀏瀏瑞旭度仙掖 (맑고 밝은 상스러운 햇살 선액을 지나가고)[br]細細和風動宮柳 (솔솔 부는 온화한 바람 궁중 버드나무 흔드네)[br]天香桂樹長三枝 (천향풍기며 우뚝 자란 계수나무 긴 세 가지는)[br]月裏精神恩雨後 (달 속에 은우내려 맑은 정기 받았다네)[br]玉壺瓊漿十分醉 (옥호와 경장으로 맘껏 취하고는)[br]晩下門안昌門扶左右 (늦어서여 좌우 부축받고 창문 내려오네)[br]君知筆力參造化 (임금께서 조화를 부리는 듯한 필력을 알아보고)[br]嗟爾小兒八叉手 (어린 나이에 능란했던 팔차수에 매우 감동하였네)] 이석형은 사간원정언에 제수되고, 이듬 해 집현전부교리에 임명되어 14년 동안 집현전학사로 재임하면서 집현전의 응교, 직전, 직제학을 두루 역임하였다. [[고려사]]를 편찬하고, [[세조(조선)|세조]] 때 한글로 [[논어]] 구결을 만들기도 했으며 대학연의 등 [[유교]] 경전을 정리했다. [[전라도]], [[황해도]]의 관찰사와 판한성부사, 판중추부사 등을 지냈으며 [[조선]]의 [[호패법]]을 정착시키고 [[조선]]의 [[히포크라테스의 선서]]인 의원정심규제(醫員正心規制)[* 의원정심규제(醫員正心規制)는 다섯 가지 항목으로 되어 있는데, 다음은 그 내용이다.[br]一 醫者 不殆硏究 深思熟考 勿爲失數之至 (첫째, 의원은 의술의 갈고 닦음을 꾸준히 한다. 심사숙고하여 잘못을 저지르지 않는다.)[br]二 醫員 夫患者 何條件貧富高下 莫論 無次別待遇 診療最善 誠實爲主 (둘째, 의원은 환자의 조건이나 빈부고하를 차별하지 않는다. 진료에 정성과 최선을 다한다.)[br]三 醫術 仁術也 慈惠濟象 非商道 勿把蓄財之道 (셋째, 의술은 인술이다. 은혜로 베풀며 축재의 상술로 삼지 않는다.)[br]四 醫道 正直診療中 病原因愆過 秘密保障 一切他方 不許發說 (넷째, 의사의 길은 정직함이다. 진료를 통해 안 병과 환자의 부끄러운 내용을 발설하지 않는다.)[br]五 醫學者 世間之尊敬人 恒時 以聖心對人 不爲驕慢 治療憑藉 不許他方利用 (다섯째, 의사는 세상 사람의 존경을 받아야 한다. 누구에게나 정성으로 대하고 교만하지 않는다. 치료를 빙자하여 다른 이익을 취하지 않는다.)]를 제정한 사람이다. 또한 이석형이 나라 녹을 먹는 몸으로 [[사육신]]을 기리는 글을 지었다가 죽을 뻔 했으나 [[세조(조선)|세조]]가 눈감아줬다고 한다. [[조선]] 전기의 8대 문장가이며, 그의 후손 중에 정승만 8명, 부원군이 3명, 3대 연속 대제학을 포함해 총 6명의 대제학이 나왔으며 판서만 37명이다. [[인조반정]]으로 정사공신 1~2등을 싹쓸이한 [[이귀]], [[이시백]], [[이시방]] 부자도 그의 후손이며, [[정조(조선)|정조]]가 늘 저서를 끼고 살았다는 월사 [[이정구(조선)|이정구]]도 그의 후손이다. 그러면서도 그의 후손 중엔 역적이나 탐관오리가 없이 깨끗 청빈하기까지 했다. * [[이속(조선)|이속]] - 호조판서 이귀산의 아들이며, [[간택]] 제도를 만들게 한 일등공신이다. 춘천군수로 재직 당시 [[태종(조선)|태종]]의 혼담을 거절했다가 노비로 전락되었다. * 이숭원 - 3등 좌리공신. 이백겸의 손자이며, 예조판서 이보정의 아들이다. [[훈구파]]의 핵심인물로서 [[세조(조선)|세조]] 때 대사헌까지 지냈다. 또한 [[성종(조선)|성종]] 즉위의 공으로 좌리공신 3등에 올랐으며 종2품 가선대부 연원군에 봉해졌다. 후에 이조판서에 올랐다. 1485년 우참찬이 되어 정조사로 [[명나라]]에 다녀왔고 좌참찬이 되어 정헌대부에 올랐다. 1489년에 다시 형조판서를 지낸 뒤 1491년 병조판서가 되었다. [[중종(조선)|중종]] 때는 청백리에 녹선되고, 1648년엔 지례의 도동사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충간공이다. 그의 후손들은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대대로 세거했고 독립운동가 여럿을 배출했다. * 이숙기 - 1등 적개공신, 2등 세조원종공신, 4등 좌리공신. 평양판관 등을 지내다가 1467년 [[이시애의 난]] 때 강순(康純) 휘하로 공을 세워 절충장군에 올랐다. 실록에 [[이시애의 난]]에서 반란군을 이숙기와 [[남이]]가 살상한 것이 셀 수 없을 정도로 가장 많다고 나와있다. 이 공으로 종2품 가정대부로 이조참판이 되고 연안군(延安君)에 봉해졌다. 후에 자헌대부로 승진하고 호조판서, 형조판서에 올랐다. * 이곤 - 자는 자정, 호는 녹창이며 첨지중추부사를 지낸 이인문의아들이다. [[성종(조선)|성종]] 23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이후 병조좌랑·헌납을 지내다가 [[연산군]] 10년에 [[갑자사화]] 때 윤은보와 함께 심문받고 장 70대의 벌을 받았다. 1506년 [[중종반정]] 이후 정국공신 4등에 녹훈되고 연성군으로 봉해졌다. 이때 이곤이 반정 주모자에게 아무 공로도 없이 울면서 공신에 끼어 달라고 청탁하였기에 이를 기롱하는 말인 ‘정곡공신(正哭功臣)’이라는 말이 나왔다. 첨지중추부사로 관압사(管押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후 밀양부사가 되었다. 밀양부사로 재직 당시 [[사헌부]]와 [[사간원]]으로부터 [[밀양시|밀양]]과 같은 큰 읍을 다스림에 부적합한 인물로 체직(遞職)을 청하는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1519년 [[조광조]] 등 [[사림파]]의 주장에 의해 부당하게 책봉되었다는 이유로 공신 위호가 삭제되었다가 [[기묘사화]] 후에 복적 되었다. 이후에 이곤이 장례원판결사·여주목사·철원부사 등을 지낼 때 갑작스런 죽음을 맞이 했는데 정부에서 검시하고 수사한 결과 노비에 의해 독살되었음이 밝혀졌다. 참고로 이곤의 비석은 태양 안에서 날개를 높이 펴고 비상하는 [[삼족오]]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러한 묘표 양식은 이곤의 묘표와 박운의 묘표, [[변안열]]의 묘표에서만 확인되는 매우 희귀한 양식이다. * 이국주 - 1등 적개공신 이숙기의 손자로 이천현감을 지냈다. 초배는 민침(閔琛)의 딸인 [[여흥 민씨]]로 관찰사 이우민 등 2남 1녀를 두었다. 나이가 들어 상처했는데, 아들 이우민이 홀몸이 된 자신에게 오히려 비안 박씨를 소개하고 계모에게도 효를 다했다고 한다. 이국주는 계배 박씨에게서 아들 이호민을 포함해 3남 1녀를 두었고, 이호민은 대제학, 좌찬성 등을 지내면서 집안을 빛냈고, 이호민이 나라에 기여한 공이 커서 이국주는 사후에 연선부원군에 봉해졌다. * 이언침 - [[사림]]의 인물이다. [[이속(조선)|이속]]의 손자인 이인충의 증손으로 1537년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성균관전적,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하였다. [[인종(조선)|인종]] 때 장령으로 있다가 사임하고, [[명종(조선)|명종]]이 즉위하자 순창군수로 나갔다. 그러나 1547년에 장미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자 우울하게 지내다 죽었다. 그 후 1570년에 직첩을 환수받았다. * 이후백 - 자는 계진, 호는 청련·청련거사, 시호는 문청(文淸). 1567년 원접사의 종사관이 되어 [[명나라]] 사신을 맞았으며, 그 해 동부승지에 발탁되었다. 이어 대사간·병조참의를 거쳐 도승지·예조참의·홍문관부제학·이조참판을 역임했으며, 1573년 변무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인성왕후]]가 죽자 3년상을 주장해 그대로 시행되었다. 1574년 형조판서가 되고 다음 해 평안도관찰사가 되어 선정을 베풀었다. 그 뒤 이조판서를 지냈다.[* 이 때의 일화가 [[선조수정실록]]에 전해지는데, 이후백은 이조판서 시절에 힘써 공론을 숭상하고 어떤 청탁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리 친구라도 자주 와서 안부를 살피면 탐탁지 않게 여겼다. 하루는 친척이 찾아와서 벼슬을 부탁하자 이후백은 낯빛이 변하면서 작은 책자 하나를 보여주었는데, 그것은 앞으로 관직에 제수할 사람들 명단이었다. 그 명단엔 친척의 이름도 그 속에 기록되어 있었다. 이후백이 말하기를, “내가 여기에 기록한 것은 장차 천거하기 위함이었소. 그런데 지금 족친께서 벼슬을 구하는 말을 하고 있으니, 청탁한 이가 벼슬을 얻게 된다면 이는 공정한 도리가 아닐 것이요. 참으로 애석하구려. 그대가 말을 하지 않았다면 벼슬을 얻었을 것인데.”하였다. 그 친척은 매우 부끄러워하면서 물러갔다고 한다. 이후백은 사람을 뽑아 임용할 때는 반드시 합당한지 여부를 두루 물어 보았고, 만약 잘못 등용한 사람이 있으면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하면서 “내가 나라 일을 그르쳤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575년부터 조정이 [[동인(조선)|동인]]과 [[서인]]으로 분당하였음에도 이후백의 공정한 인사는 시비를 걸 사람이 없었다. <연려실기술>에 나오기를 동인인 [[김효원]]은 그가 [[서인]]의 [[심의겸]]과 친하다고 하여 “후백은 다만 판서의 재목일 뿐이다. 만약 정승이 되기에 이른다면 내가 꼭 논핵할 것이다.”하였으나, 이후백은 나이가 어린 신진 관료들도 싫어하지 않아 정승 물망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그가 호조판서를 마지막으로 죽었으니 애석한 일이라고 전한다.] 또한 김귀영과 함께 대제학의 물망에 올랐으나 결국 김귀영이 대제학이 되고 이후백이 홍문관과 예문관의 제학이 되자 많은 조정 사람들이 아쉬워했다고 한다.[* 그러나 많은 사전이나 문서에선 양관 대제학을 지냈다고 나와있다. 이를 보아 후에 이후백이 정말 양관 대제학을 역임했거나(정말 역임했다고 가정하면 연안 이씨 대제학(대학사 포함) 역임자는 총 9명이다) 추증된 관직을 생전에 역임했다고 오기한 것으로 추정된다.] 호조판서 재임 시 휴가를 얻어 함양에 성묘를 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종계변무]]의 공으로 1590년 광국공신 2등으로 연양군(延陽君)으로 추봉되었다. 문장이 뛰어나고 덕망이 높아 사림의 추앙을 받았다 한다. [[함흥시|함흥]]의 문회서원에 제향되었고, 시호는 문청(文淸)이다. 저서로는 『청련집』이 있다. 여담으로 연안 이씨 인물 중 유일하게 [[택리지]]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 이호민 - 2등 호성공신이자 연릉부원군. [[홍문관]], 예문관 모두 대제학을 지낸 대학자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조선)|선조]]를 의주까지 호종했다. 이때 적의 수중에 들어간 서울을 삼도의 군사가 공격한다는 소식을 듣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선조의 착잡한 심경을 절실하게 표현한 시인 『용만행재문하삼도병진공한성(龍灣行在聞下三道兵進攻漢城)』을 지었다.[* 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br]干戈誰着老萊衣 (전쟁에 누가 노래자의 색동옷을 입을 수 있겠는가?)[br]萬事人間意漸微 (만사 인간의 뜻이 점점 희미해져가네.)[br]地勢已從蘭子盡 (지세는 이미 난자도로부터 끝났고,)[br]行人不見漢陽歸 (행인은 서울로 돌아가는 이 보이질 않네.)[br]天心錯莫臨江水 (임금께선 암담하게 압록강을 굽어보고,)[br]廟算凄凉對夕暉 (묘당의 계책은 처량하게 석양을 바라볼 뿐.)[br]聞道南兵近乘勝 (남도의 관군이 요즘 승기를 탔다고 들리던데,)[br]幾時三捷復王畿 (언제나 전승하여 서울을 수복하려나.)] 또한 이호민은 [[명나라]]로 건너가 원군을 요청한 덕에 왜군의 북상을 저지하고 [[임진왜란|왜란]]을 끝낼 수 있었다. [[선조(조선)|선조]]가 양위를 하려 할 때 [[광해군]]이 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다가 죽을 뻔 했다.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도 [[광해군]]을 밀었다. 그러나 [[북인]]들의 독재와 [[영창대군]] 살해에 반대하다 귀양갔다. [[인조반정]] 후 복권된다. 시호는 문희다. * 이광정 - 2등 호성공신이자 연평부원군. 지중추부사, 이조판서, 예조판서, 개성유수, 한성판윤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명나라]] 수군을 맞이하는 역할을 했으며 [[명나라]] 사신으로도 다녀왔다. [[청백리]]에 녹선되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그러나 [[정묘호란]] 때 [[인조]]를 호종해 강화도로 갔다가 병환으로 죽었다. [[인현왕후]]의 진외증조부이기도 하다. 또한 아버지 이주가 여러 사료와 가첩 등을 모아 족보를 준비하다 죽자 아들 이광정이 그 뒤를 이어 1605년 연리 사대파 중 처음으로 족보를 편찬하여 이홍로에게 초간본을 보낸 다음 이홍로가 청백리 이기설에게 질정을 받아 ‘을사보’가 완성되었다고 한다. * 이엽 - 태자첨사공파 중의 금성공파 파조. 종1품 찬성 이문회의 증손으로 이귀령의 곤손이다. 무과 급제한 후 금성현령을 지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전라좌병사 소속 우후로 참전하였다. [[한산도대첩]]에서 왜장 가등청정에게 잡혀 항복을 하라고 협박당했으나 끝까지 듣지 않으니 [[도요토미 히데요시|관백]]에게 압송하여 [[왜국|왜]]의 본영까지 납치되었다. 여기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이엽의 용모와 기개가 아름답다고 느껴 대장의 집에 머물게 하고 후하게 대접하면서 비단 등을 많이 주었다. 그러나 이엽은 조선인 포로들과 받은 비단을 팔아 배를 산 다음에 탈출하자고 계획을 세운 후 탈출에 성공하였지만[* 이 때 적은 시가 전해진다. 다음은 시의 내용이다.[br]東海茫茫萬里長 將軍何事自沈忙 (만리 떨어진 망망한 동해 물결 위에 어찌하여 장군은 스스로 뛰어 드시는고)[br]殺身己快葬魚腹 埋骨無勞願首陽 (내 몸 흔쾌히 던저 어복에 장사 지냄이여 뼈 묻는 수고 없이 만고충절 지켰구려.)[br]七里灘解千古咽 九嵐山色百年荒 (예날 신라 박제상을 기리는 망부석아 오늘도 안타까히 허망하게 기다린 백년)[br]君間漢代李都衛 國士心甘拜大羊 (한나라 이릉장군 생각마저 돋는구려 바다를 향해 삼가 허리 굽혀 절하노라)] 다시 추격을 받아 해중에서 스스로 배에 칼을 꽂으며 바다로 떨어져 자결했다. 이 때 적군이 바다에서 이엽의 시신을 끌어내어 환열[* 수레로 시신을 조각내는 것을 말한다.]한 뒤 거리에 걸었다고 한다. 이엽의 현손 이세온은 이를 고지에 작성하였고, 이 고지의 내용을 바탕으로 상소를 써서 [[숙종(조선)|숙종]]에게 올린 결과 그 공이 인정되어 병조참의에 증직되었다. * 이보 - [[조선]]의 의병장이자 [[이귀]]의 형이며 소부감판사공파 중 지평공파의 파조다. 이보는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금마면 사람인 소행진과 함께 의병 400여 명을 모집하고 가산을 정리하여 군량과 병기를 마련한 후 금산에 주둔한 왜진으로 향하였다. 당시 왜군은 곡창지대인 호남을 점령하여 군량미를 조달하려고 금산을 거쳐 배티재로 향하고 있었는데 왜군 1만 6,000여 명이 배티재를 넘으려 할 때 광주목사 권율이 이끄는 1,500여 명의 전라도 군사들과 소행진과 이보가 이끄는 부대를 비롯한 농민 의병군이 전투에 참여하였다. 이보와 소행진은 400여 명의 의병들과 함께 온종일 수적으로 우세한 왜병에 맞서 치열하게 싸우다 전사하였다. 후에 사헌부지평으로 증직되었으며 묘는 [[익산시|익산]]에 있다. * [[이귀]] - [[인조반정]]의 주역으로 1등 정사공신이다. [[서인]]의 영수이다. [[남한산성]]을 높게 올렸고, [[호패법]]을 재정비해 군역 대상자를 확실히 했으며, [[만주족]]에 대한 각종 국방력 강화에 온 힘을 다했다. 그러나 이미지와 다르게 [[지천 최명길]]과 함께 주화파였다. 후일 사계 [[김장생]]과 함께 [[인헌왕후]] 구씨의 상에 기년을 주장하다가 파직됐었으나 [[정묘호란]] 때의 비상시국을 [[조선]]이 잘 넘길 수 있도록 온힘을 다했다. 또한 1624년, 개성유수로 재직 당시 건장하면서 용감한 자를 모집하여 화포를 연습시켜 어영군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어영청]]의 시초이고, 이귀가 어영사로 임명된 것이 어영사 제도의 시초였다. 더불어 이귀는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이 벌어질 것을 예견하고 만주족의 침입에 대비한 [[조선]]의 방어전략을 담은 [[이충정공 비어방략]]을 기록했는데 이 문서는 총 3권이며, 현재 [[미국]]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UC) 버클리의 리치먼드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 이씨 부인 - 여류시인. 부사 신순일의 부인으로 이정현(李廷顯)의 딸이다. 어릴 때부터 글짓기를 좋아했으며 시에 능하고 글씨도 잘 썼다. 주역과 이백의 글을 필사했으며 유집이 1권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씨의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향거즉사가 있으며 〈실제(失題)〉 1편이 전하는데 비오는 날 자신의 아름다웠던 청춘을 회고하는 내용이다. * [[이정구(조선)|이정구]] - [[조선]] 중기의 4대 문장가를 이르는 말인 [[월상계택]]의 '월'이 그를 일컫는 말이다. 월사집을 남겼고 대제학과 좌의정을 지냈다. 많은 명문과 그림을 남겼으며 해동명신록에도 이름이 올라 있다. [[경기도]] [[가평군]]에 묘소가 있다. [[이귀]]의 아버지 이정화와 육촌형제간이지만 [[이귀]]보다 7살 아래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이 일어났을 때 중국어에 능하여서 어전통관으로 [[명나라]] 사신이나 지원군을 접대할 때 [[조선]] 조정을 대표하며 중요한 외교적 활약을 했으며, 양호 사건과 [[정응태 무고사건]]에 [[조선]] 조정이 휘말려서 [[명나라]]에게 곤혹을 치르게 생겼을 때 이정구가 [[명나라]] 조정에 상신한 주문으로 겨우 혐의를 벗었을 뿐만 아니라 당시 [[명나라]] 사람들이 [[조선]] 국왕의 충간의담에 감동하여 눈물을 흘리기까지 했다는 평이 [[연려실기술]]에 실려 전한다고 한다. 이후 [[인조]]가 즉위하자 세자이사와 우의정, 좌의정 등을 지냈다. 시호는 신하로서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시호인 문충(文忠)이다. 여담으로 [[조선]] 문인 최초로 [[중국]]에 책을 발간한 인물이다. * 이유길 - 어린 나이에 [[명량해전]]에 출전해 [[이순신]] 밑에서 전공을 세우고 군인의 길을 걸었다. 그러나 [[청나라]]가 일어날 때 우영장으로서 [[명나라]] 원군으로 갔다 [[만주]]에서 전사했다. 그가 오랑캐에게 포위될 때 피로 "3월 4일 죽었다"라고 삼베에 적어 말에 매어 보냈다. 주인 잃은 말이 [[만주]]에서 1,000km를 사흘 만에 달려 그의 고향집에 와서 슬피 울고 절명했다고 한다. 말을 묻은 곳이 [[파주시|파주]] 의마총이다. 의마총은 현재 [[파주시]] 지정 유적이다. 이유길은 [[영조]] 대에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에 추증됐다. * 이경엄 - [[조선]] 중기의 문학가. 연천군. 본은 [[https://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5103100209115003&editNo=45&printCount=1&publishDate=1995-10-31&officeId=00020&pageNo=15&printNo=23013&publishType=00010|연안]], 자는 자릉(子陵), 호는 현기(玄磯)이다. 연릉부원군 이호민의 아들이며 한성판윤을 지낸 후 기로소에 들어갔고 연천군에 봉해졌다. 사후에 [[우의정]]에 증직되었으며 시문집으로는 『과정습유(過庭拾遺)』를 남겼다. 시조 15수와 [[가사#s-1.2]] 사천귀전가(斜川歸田歌)가 전한다. * 이홍로 - 연성군 이곤의 증손으로 1579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583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처는 영의정 [[기자헌]]의 누이로 [[행주 기씨]]다. 1592년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병조좌랑으로서 [[선조(조선)|선조]]를 호종하다 도망을 가는 등 여러 이유로 탄핵을 받았고, 후에 다시 함경도종사관, 충주목사 등을 지냈으나 재차 탄핵되어 [[평안북도]] [[강계시|강계]]와 [[제주도]] 등으로 귀양갔다. [[제주도]]에서 해배된 후 풀려나와 [[경기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1608년 [[유영경]] 등 [[소북]]의 일파로 몰려 다시 제주에 유배된 후 사사당하였다. 1612년에 [[유영경]]과 김대래와 함께 [[부관참시]]되었다. 또한 [[광해군]]에게 역신으로 낙인되는 바람에 가문이 풍비박산나는데 아들 이승원, 이승형은 [[유영경]]의 아들 유열과 함께 연좌되어 처형되고 남은 아들 이승업마저 교수형에 처해졌으나 다행히 이승업에겐 아들 2명이 있었고 그 중 이여주는 이승원에게 입양된 뒤 안악군수를 지내 세대를 이어갔다. 이홍로는 1623년 [[인조반정]] 후에 신원되어 이조참판에 증직되었다. * [[이시백]] - [[조선]] 고전소설 [[박씨전]]의 주요 인물이며, [[인조반정]]을 성공시킨 1등 정사공신 [[이귀]]의 아들로 본인도 2등 정사공신에 올랐다. 시호는 충익이다. [[병자호란]] 때 화살을 맞으면서도 [[남한산성]]을 지켰다. 아버지 [[이귀]]에 이어 2대에 이은 충정이었다. [[김육]]의 [[대동법]]을 지지하였으며 [[서인]]의 영수로서 [[예송논쟁]]을 이끌었고 영의정을 지냈다. 여담으로 [[인조]]가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이시백은 이경여와 함께 반대하며 [[소현세자]]가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결국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한 뒤 술자리를 만들어 이시백을 불러 "병판은 주량이 얼마나 되오?"라고 물은 뒤 이시백이 "신은 술을 잘 못하고, 병이 있어 더욱이 못합니다"라고 답하자 인조가 "그 병은 남한산성을 지키다 생긴 병이다"라고 말하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인조]]는 다시 이시백의 자녀가 몇 명인지 묻고, "왜 과거를 보지 않느냐? 나라에 충성하려면 무과라도 좋다. 나는 그대의 부친의 공을 잊지 못한다. 자식들이 과거를 보기를 바란다."라고 자녀들이 과거를 보게 하라고 부탁하였다. 이에 이시백은 감동하여 "아버지가 눈감기 전에는 오직 나라가 있음을 알 뿐이었습니다. 이제 전하의 말씀을 듣고 보니 감읍하여 눈물을 금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답하자 [[인조]]는 자리를 같이한 [[봉림대군]]으로 하여금 이시백에게 술을 따르게 하며 “내가 이분을 팔다리처럼 여기니, 너도 뒷날 이분을 높게 대접하라!”라고 당부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시백의 증손인 이하가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여 집안이 풍비박산 났다. 이에 이하는 능지처참 되었고, 후에 신원되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이 때문에 이하의 동생인 이척과 아들 이명구 등 일가가 죽거나 귀양을 갔고, 이들의 처는 노비가 되었다고 한다. * 이여순(李女順) - [[이귀]]의 장녀로 1587년에 태어나 [[인조반정]]의 일등공신 [[김자점]]의 형인 유학 김자겸과 혼인하였다. 부부는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두 사람은 혼인 후 일반적인 부부관계가 아니라 함께 불도를 닦는 도반 관계를 유지하며 살아갔다. 김자겸에게는 오언관이라는 서얼 출신의 친구가 있었는데, 오언관은 김자겸의 집을 자주 드나들며 이들 부부와 함께 수행을 하고 불법을 논하는 관계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김자겸이 1608년에 요절했는데, 이때 오언관에게 “내가 죽더라도 집에 드나들며 내 아내와 불도를 논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후 수년간 오언관은 이여순(李女順)의 집을 드나들며 [[불경]]을 가르쳐 주었다. 1614년에 오언관이 [[경상도]]로 낙향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여순(李女順)은 함께 [[덕유산]]으로 내려갔고, 그곳에서 [[비구니]]가 되었다. 비구니가 된 후 이명을 예순(禮順)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 일은 예순비구니와 오언관의 간통 사건으로 둔갑해 [[광해군]]이 직접 심문하는 일까지 일어났는데, 오언관이 [[강변칠우|강변칠우 사건]]의 범인인 박치의로 오인돼 잡히면서 발생한 일이었다. 이에 오언관과 함께 이예순(李禮順)도 [[의금부]]로 압송되었다. 이에 [[이귀]]는 딸을 잘못 관리했다는 이유로 [[북인]]들에게 극렬하게 공격당했다. 그러던 와중 오언관이 [[의금부]]에서 공초를 받던 중 극심한 고문 끝에 옥사하였다. 이예순(李禮順) 역시 처형될 뻔하였으나 [[광해군]]에 의해 방면되었다. 그 후 예순비구니는 왕실 비구니원인 자수궁에 머물렀고, [[광해군]]의 정실 [[문성군부인|문성군부인 류씨]]와 [[김개시]] 등의 왕실 여성들로부터 생불로 칭해질 정도로 깊은 신망을 얻었다. [[연려실기술]]에는 “예순이 궁중에 출입하니 대궐 안 사람들이 모두 생불이라 일컬으며 신봉함이 비할 데 없었다”고 기록돼 있다. 특히 [[김개시]]와는 모녀지간을 맺을 정도로 친분이 돈독했다. 그러나 이예순(李禮順)은 [[광해군]]을 내쫓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아버지 [[이귀]]와 시숙 [[김자점]]은 서인세력을 규합해 [[광해군]]의 폐위를 도모하고 있었다. 그러나 [[광해군]]이 이를 눈치 채고 이들을 일망타진하려 하자, 예순비구니는 [[광해군]]의 측근인 상궁 [[김개시]]에게 편지를 보내 아버지 [[이귀]]의 무고함을 호소하였다. 김개시는 이예순(李禮順)의 부탁을 받은 직후 [[광해군]]에게 "충신들을 저버리지 말라"는 잘못된 조언을 던졌다. 이에 [[광해군]]은 [[이귀]] 등 반정세력에 대한 처벌을 보류하였고, 반정세력은 거사 시일을 앞당겨 [[인조반정]]을 성사시켰다. 반정 후 궁궐을 나온 그는 왕실의 지원을 받아 절을 중창하는 등 불교 진흥에 남은 생을 바쳤다. 동대문 밖 청룡사와 [[도봉산]] 회룡사의 중창 불사를 그녀가 주도한 것으로 나온다. 1657년에 71세의 나이로 입적하기까지 비구니 이예순(李禮順)의 신앙과 행적은 [[광해군일기]], [[어우야담]], 공사견문록 등 비교적 많은 곳에 전해 온다. 이예순(李禮順)은 당시 일반적이던 도피로서의 여성 불교가 아니라 여성과 불교에 적극적인 힘을 축적한 유래없는 역사적인 사례로 꼽힌다. * [[이시방]] - [[이귀]]의 아들로 정사공신 2등으로 연성군에 봉해졌다. 판의금부사, 호조판서를 지냈다. 제주 목사를 역임하고 있을 때 [[광해군]]이 죽자 소복으로 친히 염습하여 사변을 잘 처리하기도 했다. 그가 저술한 서봉일기에도 [[광해군]] 사후 처리 과정을 자세히 기록했다. 이시방은 훈구공신 집안 출신이면서도 사림 출신 정승 [[김육]]을 따르며 형 [[이시백]]과 함께 [[대동법]]을 떠받쳤다. 영의정에 추봉되었다. * 이명한 - 삼등현령 이계의 손자이자 좌의정 [[이정구(조선)|이정구]]의 아들이다. [[광해군]] 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616년에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한 뒤 공조좌랑 등을 지냈다. 1623년 [[인조반정]] 후 경연시독관에 제수되었다. 이어 이조좌랑이 되어 어사로 관동에 나가 서리들의 정치와 백성들의 폐해을 살폈다. 이후 옥당에서 근무하다가 호당에 들어갔다. 또한 사가독서를 했으며, 승문원제술관, 한학교수, 교리 등을 겸대하다 이조정랑이 되었다. [[이괄의 난]] 때 [[인조|왕]]을 공주로 모시고 가서 [[이식(조선)|이식]]과 함께 팔도에 보내는 교서를 지었다. 이어 응교·사간에 승진한 뒤 이조참의로 승진했다. 다시 사가독서를 허락받고 호당에 들어갔고 승문원부제조가 되었다. 도승지 등을 거쳐 1641년 한성부우윤·대사헌이 되었고, 홍문관·예문관의 양관 대제학, 이조판서 등을 역임했다. 1643년 이경여, 신익성 등과 함께 척화파로 지목되어 [[심양]]에 잡혀가 억류되기도 했다. 이듬해 세자이사가 되어 심양에 가서 볼모로 잡혀간 [[소현세자]]를 모시고 왔다. 1645년에 [[명나라]]와 밀통한 자문(咨文)을 썼다 하여 다시 [[청나라]]에 잡혀갔다가 풀려나와 예조판서가 되었다. [[병자호란]] 때 심양까지 잡혀갔던 의분을 노래한 시조 6수가 전한다. 저서로 『백주집』 20권이 있다. 서산에 일모하니 또한 이명한의 작품이며, [[남구만]]이 지은 것으로 알려진 동창곡이 사실 이명한이 지은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이어지고 있는데 그 근거 중 하나가 『약천집』에 당시 유행했던 한글 시조 [[정몽주]]의 단심가, [[이항복]]의 철령숙운가와 함께 동창곡이 나와 있는데 이명한의 시조로 나와 있기 때문이다. 여담으로 1642년 진사시에 아들 이만상이 시험을 봤는데, 당시 부친인 이명한이 시험관으로 있었다. 모든 사람이 이만상이 1등을 할 것이라고 하였으나, 시사를 관장하던 부친은 중의(衆議)를 물리치고 아들 이만상을 2등에 두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아들 이만상은 부친의 병에 마음을 졸이며 간호를 하다 몸이 상하여 33세의 나이로 요절하고 말았다. * [[이일상]] - 이명한의 큰아들. 17세 소년 등과한 천재. 문과급제를 하고도 너무 어려 임관을 못하고 몇 년간 책만 봤다. [[병자호란]] 당시까지도 아직 새파랬는데 [[청나라]]에 대해 주전론만 주장하다가 [[전라남도]] [[영암군]]으로 귀양갔다. 이후로도 파직됐다가 복직됐다가 관직 생활이 평탄치 못했지만 결국 비변사당상과 대제학, 예조판서 등을 지내고 우의정에 추증. 동촌 이씨 8상 중 첫째다. * 이관징 - [[숙종(조선)|숙종]] 대 [[남인]]. [[숙종(조선)|숙종]]의 신임을 받아 대사헌·이조판서 등을 거쳐 판중추부사를 지냈다. 두루 관직을 거쳤으며 청렴한 관리로 이름났다. 그러나 [[갑술환국]] 때 삭출되었다가 이듬해 직첩이 환급되었다. 여담으로 당시 영의정 [[권대운]]이 [[기사환국]]으로 자신이 다시 집권하자 정치적 동료인 좌의정 목내선, 공조판서 오정위, 좌참찬 이관징과 대신들의 아들들을 불러 연회를 베풀었다. 이를 그림으로 그린 것이 <권대운 기로연회도>이다. 이 작품은 집단 초상화의 성격을 가진 작품으로 연회에 참석한 이들의 이목구비가 뚜렷하게 그려졌다. 또한 이 연회에 참석한 이관징의 아들 이옥은 이 모임을 기념하여 「사로연회병서(四老宴會屛序)」라는 글을 남겼다. * [[이단상]] - 대제학 이명한의 아들로 자는 유능(幼能), 호는 정관재(靜觀齋), 서호(西湖),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진사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고, 다음 해 병과로 문과에 급제했다. 이조와 병조의 정랑을 지냈으며, [[의정부]] 사인으로 지제교를 겸했다. 이후 사가독서를 한 뒤 대간에 들어가서 정론(正論)을 밝히기도 했다. 이후 부제학 등을 지냈다. 사후 민정중의 건의로 이조참판 겸 경연, 양관제학에 추증됐다가 이조판서로 다시 추증됐다. * 이인징 - 자는 옥서(玉瑞), 호는 운강(雲崗). 관찰사 이창정의 손자이며, 지평 이완의 아들이다. 1675년에 사마 양시에 합격하고 1679년에 식년문과에 장원하여 이듬해 정언이 되었다. 이후 부수찬·부교리·사간·집의·수찬·교리 등 삼사의 직책을 두루 지내고 1690년에 시강원보덕을 거쳐 당상관인 승지에 올랐다. [[숙종(조선)|숙종]]이 승하하고 [[경종(조선)|경종]]이 즉위하자 지의금부사(知義禁府事)로 승진하였다. 1724년에는 공조판서를 거쳐 한성판윤에 임명되었다. 한성판윤 시절에 늙고 신병이 많아 한성부의 수많은 송사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체직되어 다시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영조]]가 즉위한 뒤에도 공조판서와 한성판윤을 번갈아 수행하다가 공조판서로서 벼슬길에서 물러나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어가는 영예를 입었다. 여담으로 이인징의 아들 이혼(李混)은 모종의 이유로 [[영조]] 6년에 주살되었으며[* 이혼(李混)의 경우 아들 이만식(李萬軾)이 후에 소원(訴冤)하여 그 죄는 풀렸다.], 이인징의 조카인 이렴(李濂)[* 이렴(李濂)은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여 노적된 이만구(李萬衢)의 숙부이기도 하다.]이 [[영조]] 21년에 [[영변군|영변]]에 유배되어 있던 [[이인좌의 난]]의 잔당이 일으킨 모역의 주모자로 잡혀와 문초당한 후 노적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으로 이렴(李濂)의 아들 이만인(李萬寅)[* 후에 이만인(李萬寅)을 포함한 이렴(李濂)의 세 아들은 모두 교살되었다고 한다.]과 조카 이만보(李萬輔), 이만장(李萬長)이 유배되었다. * 이희조 - [[이단상]]의 큰아들이다. 부친인 [[이단상]]의 뜻을 계승하여 [[서인]]의 의리론을 수호했다. [[노론]]과 [[소론]]의 분열 당시 [[노론]]에 선다. [[신임사화]]에 연루되어 [[영암군|영암]]에 유배되었다. 이후 [[철산군|철산]]으로 이배 도중 [[정주시|정주]]에서 사망했다. 생전에 이조참판과 대사헌 등을 지냈으며, 사후 좌찬성에 추증됐다. * 이석관 - 자는 대유, 호는 삼금당. [[전라도]] [[영암군|영암]] 출신으로, 관찰사와 이조참의 등을 지낸 이숙함의 후손이며, [[종계변무]]의 공으로 광국공신 2등 연양군에 추봉된 청백리 청련 이후백의 현손이다. [[숙종(조선)|숙종]] 12년에 무과 병과 1위로 급제하여 연리 인물 중 유일하게 [[삼도수군통제사]]를 지냈다. * 이하조 - 자는 낙보, 호는 삼수헌. [[이단상]]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우의정 이행원의 딸이다. 부인은 김창국의 여식인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이다. 1682년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었으나, [[송시열]]의 문인이 되어서 성리학에 몰두하였다. 그는 삼수헌을 지어놓고 10여년 동안 자연 속에 묻혀 지내다가 음보로 기용되어, 1694년에 세자익위사세마가 되었으며, 이어 사복시주부·공조좌랑을 지내고, 1698년에 부평현감으로 나가 치적이 높았으나 37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여담으로 김창국의 다른 딸은 [[숙종(조선)|숙종]]의 후궁인 [[영빈 김씨]]이다. * 이정보 - 대제학 이일상의 증손으로 [[경종(조선)|경종]] 1년에 진사시에 합격하고 [[영조]] 8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병조좌랑, 정언 등을 지내다 탕평책을 반대하는 시무십일조를 상소했다가 면책을 받고 사직했다. 1737년에 다시 조정으로 돌아와 교리가 되고 이조좌랑, 교서관교리, 이조정랑, 응교, 형조참의, 동부승지, 병조참의 등을 역임하였다. 1740년엔 수원부사가 되어 부성을 쌓고 목장을 설치해 전마를 기르고 군비를 충실히 하였으며, 1742년엔 승지로 전임하여 부제학, 대사성, 대사간, 병조참의를 역임하였다. 이후 함경도관찰사에 임명되어 상벌을 공평히 하고 비용을 절감해 변경을 안정시켰다. 이듬해 한성좌윤, 동지의금부사, 오위도총부도총관, 비변사제조 등을 지냈으며, 1750년에 도승지로 다시 탕평책을 반대하다가 인천부사로 좌천되었다. 2년 뒤 동지경연사, 성천부사를 거쳐 이듬해 좌부빈객이 되고, 1754년에 한성판윤 겸 오위도총관, 형조판서를 지냈다. 1755년에 우참찬, 예조판서, 판의금부사, 동지성균관사 등을 역임하고, 1756년에 공조판서로 홍문관·예문관의 제학과 지경연사·좌빈객을 겸하였다. 1758년엔 이조판서로 지춘추관사, 판돈녕부사를 겸하고 이어 좌참찬, 세손의 사부가 되었으며 1761년엔 이조판서로 수어사를 겸하였다. 1762년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1763년 예조판서, 대제학, 지성균관사에 이어 판중추부사로 보국숭록대부에 승진하였다. 성품이 엄정하고 강직하여 상소를 하다 여러 번 파직되었다. * 이후 - [[노론]]의 영수로 영의정 [[이시백]]의 5대손이며, 좌의정을 지냈다. 이후에게는 과거 시험과 관련된 야사가 존재한다. 야사에 따르면 이후는 늙도록 과거에 응시했으나, 모두 낙방하고 음서로 [[조선]]의 지방관 중 3대 요직인 나주목사를 지내고 있을 때 형 이유가 자신의 생일잔치에 참석해달라고 하여 잔치에 갔다. 이때 이유가 점쟁이를 불러 점을 보게 했는데, 동석했던 호조판서가 "언제 일일이 점을 보겠느냐? 제일 먼저 정승이 될 것 같은 인물을 고르라."라고 하자 점쟁이는 당시 과거를 모두 낙방해 음서로나마 나주목사를 지내고 있던 이후를 지목했다. 이에 이후는 "내가 과거에 붙지도 못했는데 어떻게 정승이 되냐"며 화를 내고 나왔다고 한다. 그날 밤 이유가 "이것도 인연인데 과거를 보라"고 권했고, 이에 이후가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합격했다. 이 일로 [[한양]]에선 낙방 도사가 과거에 합격했다며 떠들썩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후는 정말로 9년 만에 정승이 되었다.[* 형 이유는 정승은 하지 못하고, 이조판서와 병조판서 등을 지냈으며, 재주와 능력은 있었으나 성품이 부박(浮薄)하고 사휼(詐譎)한데다 무식하여 사리에 어긋난 일이 많았고, 임금에게 아첨을 잘해 최고의 총우(寵遇)를 받았다는 등 평판이 매우 안 좋았다고 한다. 그러나 풍원군 [[조현명]]은 그의 죽음을 듣고서는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라를 위해 함께 일할 만한 사람이 죽었다."라고 하였다.] 좌의정으로 세자부(世子傅)를 겸하였으며, 이듬해 [[사도세자]]의 [[평양]] 원유사건을 비롯하여 유언비어가 심한 데 대한 왕의 추궁을 받자, 그에 책임을 느낀 나머지 이천보(李天輔)·민백상(閔百祥) 등과 음독자살하였다. 시호는 정익(定翼)이다. * 이천보 - [[영조]] 대 영의정, [[노론]]의 영수이다. 증조부는 비변사 당상을 지낸 이일상이고, 광성부원군 [[김만기(조선)|김만기]]의 외손자로 [[인경왕후]]의 조카이다. 또 판서 이문원의 양아버지이자 좌의정 이존수의 조부이다. 이조판서·병조판서 등을 거쳐 1752년 우의정에 승진하고, 같은해 좌의정에 올랐다가 영돈녕부사로 전임되었다. 1761년 영의정에 올랐으나 [[사도세자]]의 평양 원유사건에 인책하여 음독 자결하였다. 가마나 말이 아니라 검은 소를 타고 다녀 까막소 대감이란 별칭이 있었다고 한다. 사위는 [[풍양 조씨|풍양인]] 우의정 조경이다. * 이지억 - 자는 덕수(德廋)·항승(恒承)·대수(大廋), 호는 성헌(醒軒)이다. 이조판서 이광정의 후손이며, 이성징의 증손으로 생부는 이만선이고, 양부는 정랑 이만성이다. 이지억의 육촌인 이지서[* 후술하겠지만 이지서는 괘서를 작성하여 붙인 탓에 모진 고문을 당했고, 고문 끝에 물고(物故)를 당하였다. 또한 이지서에겐 장남 승연, 차남 항연 등 아들 6명이 있었는데, 괘서를 쓴 차남 항연은 섬으로 유배되었다(참고로 연안 이씨 족보엔 이지서의 아들로 승연과 경연만 기록되어 있으며, 차남 항연과 다른 아들들은 기록되지 않았다. 이승연의 장손 이우홍은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고, 이승연의 차남 이민덕은 이지서의 동생 이지절의 차남 이복연에게 양자를 갔고, 그 후손이 아직까지 존재한다. 이지서의 또 다른 아들 이경연은 슬하에 서자 이현덕을 두었지만, 이현덕의 후손에 대한 기록이 없다). 이지서의 종친인 이만춘(李萬春) 역시 [[이인좌의 난]]과 관련된 조덕규의 처남으로 지목되어 고문을 당했다. 이만춘(李萬春)의 아들 이지경(李之景)(연안 이씨 족보에 의하면 이만춘(李萬春)은 5명의 아들을 두었고 다섯 아들 모두 지(之)자와 일(日)자를 부수로 하는 한자를 돌림자로 사용했다. 그러나 5명의 아들 중 이지경(李之景)이라는 이름은 찾을 수 없다. 이에 이지경(李之景)은 연안 이씨 족보에 기록되지 못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변방에 유배되었다. 실록을 보면 [[이인좌의 난]]의 역적 이지경(李之暻)을 극형에 처하고, 그 처자도 연좌시켜 노비로 삼으며, 재산은 몰수하였다는 기록이 나오는데[[http://sillok.history.go.kr/id/kua_10504025_003|#]], 이지경(李之暻)은 이지경(李之景)의 다른 이름이거나 이지경(李之景)의 일족일 수도 있다. 더불어 실록을 보면 이지간(李之榦)은 역적 민관효와 친하다는 이유 등으로 이만춘(李萬春)과 같이 유배되었다고 나오는데[[http://sillok.history.go.kr/id/kua_10405016_009|#]], 이지간(李之榦) 역시 이들의 일족일 수도 있다.]는 [[이인좌의 난]]에 가담하여 참수당한 이지시[* 이지시는 이성징의 손자였다. 이로 인해 인척인 이만근(李萬根)과 이만춘(李萬春)이 고문을 당했으며, 일족 진잠현감 이만동(李萬東) 역시 이들의 일파로 몰려 곤장을 맞고 죽었다. 이에 이만동(李萬東)의 부인 우계임과 아들 태연, 두 딸 미순·종순은 [[경상도]] 단성의 관노와 관비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우계임의 나이는 41살이었으며, 아들 태연(泰延)은 13살, 두 딸 미순(美順)·종순(終順)은 각각 8살, 5살의 어린 나이였으며 단성 호적에는 이들은 30년이 넘도록 유배지를 떠나지 못하고 단성에서 고단한 삶을 이어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또한 아들 태연과 두 딸은 연안 이씨 족보에서 사라지는 불운을 겪었다고 한다. 연안 이씨 족보를 보면 이만동(李萬東)의 아들 이지현(이태연(李泰延)의 아버지로 추정되는 인물로 이태연(李泰延)이 이만동(李萬東)의 아들이라고 상술했던 내용과는 다른데, 자세한 내용은 후술한다)은 이조연을 양자로 삼았으나 이조연이 자식을 두지 못해서 절손된 것으로 나온다. 이지현의 양자 이조연 외엔 다른 자식들이 기록되어 있지 않다.] 다만 이 이야기에는 한 가지 오류가 있는데 이만동(李萬東)의 아들은 연(延)자 돌림이 아니라 지(之)자 돌림으로 이만동(李萬東)은 아들 이지현을 둔 것으로 나온다. 연(延)자 돌림은 이만동(李萬東)의 아들이 아니라 손자뻘 항렬이다.]의 재종이라는 이유와 그의 일파인 이지경(李之璟)과 이만춘(李萬春)의 일족이라는 이유로 과거를 보지 못해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하는 데에 불만을 품고 괘서를 작성하여 붙인 혐의에 대해 추국 당하는 과정에서 자신의 육촌인 이지억을 포함해 이지억의 형제 이지양과 이지목을 자신의 일파라고 지목하여 친국을 받았으나 이지억이 논리정연하게 논변하여 [[영조]]로부터 비상한 재주를 인정받게 되었다. [[영조]] 27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주서·장령을 거쳐 승지가 되었다. 1754년 강릉부사·도승지를 거쳐 공조판서에 이르기까지 벼슬에 나간 지 10년이 못 되어 정경(正卿)의 자리에 올랐는데, 관작은 모두 [[영조]]의 특교에서 나온 것이었다. 당시 조정에서는 그의 승진이 관작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처사라 하여 여러 차례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이 때문에 공조·형조·병조판서와 한성부판윤을 역임하는 동안 파직과 등용이 반복되었다. 그가 죽자 [[영조]]는 몹시 애석히 여기고, 그에게 자식이 없으므로 입후(立後)하게 하였으며, 상례에 필요한 모든 물품을 내려주었다. 그리고 그의 후손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주석 [[이동녕]] 선생이다. * 이민보 - [[노론]]의 인물로 자는 백눌(伯訥), 호는 상와(常窩)·풍서(豐墅),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진사시에 합격한 뒤 음보로 군수가 되고 장악원정, 동부승지, 호조참판을 역임했다. 그 후 [[정조(조선)|정조]] 15년에 공조판서가 되어 장악원제조를 겸했으며, 그후 형조판서에 전임되었다. 1796년 노인직(老人職)으로 보국숭록대부(輔國崇祿大夫)의 위계에 올라 돈령부판사가 되었는데, 음보로 보국숭록대부에 오른 것은 영의정 [[황희(조선)|황희]]의 아들 [[황수신]] 이후 처음이었다. 판서 이조원(李肇源)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 이명식 - [[시파]]의 원년 멤버이다. [[영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함경도관찰사·판의금부사·공조판서·이조판서·형조판서·비변사당상·의정부좌참찬·개성부유수·병조판서·의정부우참찬·예조판서·가례도감의 제조·판돈녕부사 등을 지냈다. 1788년에 평안도관찰사 재직 당시 환곡과 그 발매의 폐단을 아뢰었다. 육조의 판서를 모두 지냈으며, [[정조(조선)|정조]] 21년엔 봉조하가 되어 정1품 보국숭록대부가 되었다. 또한 글씨를 잘 써 [[정조(조선)|정조]]가 신하 124명에게 주자의 시 1224수를 필사하게 할 때 아들과 함께 발탁되어 영광으로 여겼다. 그가 사망하자 [[정조(조선)|정조]]가 애도하였으나 1801년 지평 심보영(沈普永)과 윤우렬(尹羽烈) 등의 상소에 따라 추삭되고 1805년에는 아들인 이면응(李冕膺)까지 탄핵을 받았다. 그 후 복관되어 1820년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이성원 - 병조판서, 경상도·평안도관찰사, 우의정을 거쳐 좌의정에 올랐다. 좌의정 재직 중 [[가체|다리]]는 사치일 뿐 일종의 폐단이니 [[가체|다리]]를 금해야 한다고 했다. 1789년에 동지 겸 사은사로 [[청나라]]에 파견 되었다가 돌아와서 죽었다. * 이조원(李祖源) - 이진보의 아들로 1735년에 태어나 1806년에 죽었다. 1790년에 경상도관찰사를 지냈다. 한성부좌윤으로 재직중이던 1791년 동지부사로 [[베이징시|연경]]에 다녀와 대사성을 역임한 뒤 대사헌에 올랐지만 곧 체직되었고, 도승지를 거쳐 형조판서에 올랐다. 1796년에 예조판서로 서용되었고, 그 뒤 형조·병조의 판서를 지냈으며 공조판서로서 동지사가 되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우참찬·형조판서·한성부판윤을 지냈다. [[순조]] 이후 [[노론]]의 [[시파]]로 활약하다가 1805년 김대비 계인 김달순과 함께 [[신 안동 김씨|안동 김씨]]의 [[김좌근]]에 맞서다가 방귀전리 당했다. * 정부인(貞夫人) 연안 이씨 - 재주와 문필이 뛰어난 여류 문사. 예조판서 이지억의 차녀로 1737년에 출생하였다. [[류성룡]]의 8세손인 류사춘과 결혼하여 [[안동시|안동]]에서 유복하게 살면서 3남 1녀를 두었다. 그중 장남은 초계문신(抄啓文臣) 류태좌이다. 연안 이씨는 『쌍벽가』와 『부여노정기』 등 규방가사를 지었다. 『쌍벽가』는 [[정조(조선)|정조]] 18년에 [[안동시|안동]] 하회에서 지은 것으로 맏아들 태좌와 큰조카 상조가 동년 동학으로 함께 과거에 급제하니 [[정조(조선)|정조]]가 장질을 인견(引見)하고 이 훌륭한 일과 아울러 [[류성룡]]의 음덕(陰德)을 기려 제문을 지어 승지 이익운으로 하여금 치제하게 하자, 그날 즉석에서 이 노래를 지었다고 한다. 2음보 1구로 계산하여 전체 326구이다. 또한 제목에 쓰인 ‘쌍벽’은 과거 급제한 두 형제의 준수하고 출중함이 서로 백중함을 칭찬한 것이다. 이 가사는 구성의 일관성, 뛰어난 조사(措辭), 유려한 문장 등에 있어, 규방가사 중 수작으로 꼽힌다. 또한, 대부분의 규방가사가 작자와 연대가 미상인 데 비하여, 『쌍벽가』는 작자와 연대가 잘 알려진 작품이며 연대가 가장 오래된 작품이라는 점에서 자료적 가치가 있다. 『부여노정기』는 내용은 하회에서 [[부여군|부여]] 관아까지 도임하는 행차에 내행(內行)으로 끼어 여행하는 동안의 기록을 기행문으로 읊은 동시에, 부여 관아의 생활과 도임잔치, 남편의 수연(壽宴) 잔치를 읊으면서 성은에 감축하고 있다. 여행하는 동안을 읊은 내용은, [[예천군|예천]]의 오천내, 삼산에서 옛 벗을 만남, 함창의 정결한 음식, [[상주시|상주]]의 인물, [[보은군|보은]]의 속리산, 노성의 은진미륵, 오리정의 넓은 들과 풍경 등이다. 이 역시 작자와 연대가 확실한 규방가사 중에서는 가장 오래된 작품 중의 하나이며, 수작에 속한다. * 이기연 -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로 연평부원군 이광정의 6세손으로 이지계의 사남이다. [[충주시|충주]]에 있는 교회의 중추적인 인물로 이기연은 동생인 이최연과 함께 아버지의 기일 때 제사를 지내지 않다가 [[함경도]] [[종성군|종성]] 근처로 유배를 갔으나 유배지에서도 신앙생활을 계속하고 유배지 근처에 사는 사람들에게 포교 활동을 계속한 탓에 1801년에 참형되었다. 참고로 이기연은 동생 이최연과 함께 연안 이씨 족보에서 삭제되어 현재 연안 이씨 족보에서 이지계의 아들은 3명으로 나온다. * 이문원 - 본래 영의정 이천보의 먼 친척인 이국보의 아들이었으나 아들이 없는 이천보에게 입양되었다. 1763년 진사시에 합격하여 음서(蔭敍)로 휘령전(徽寧殿)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뒤에 관직이 호조좌랑에 이른 후 1771년 문과에 급제하여 삼사와 [[승정원]] 등의 관직을 두루 거쳐 동래부사, 경상도관찰사, [[성균관]] 대사성, 여주목사, 선혜청 제조, 공조·이조·형조·병조·예조의 판서, 함경도관찰사, 판의금부사 등을 지냈다. 병판을 지낼 때 인척인 오재순이 이판에 오르자 한 집안에서 양전을 겸할 수 없다며 사직했다. 1788년엔 이조판서로 재직 중 [[홍봉한]]과 가까운 한덕후를 사헌부에 천거한 일로 비난을 받자 빈청에서 조복을 벗어던지고 물러나 [[숙천군|숙천]]에 3개월간 유배되는 등 소소한 처벌들을 겪기도 하였다. 1790년엔 이조원(李祖源)이 경상도관찰사로 임명되자 이문원이 자신은 황해도감사, [[이시수]]가 함경감사로 재직 중이므로 연안 이씨 일문이 삼번(三潘)을 맡을 수 없다 하여 사직소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1792년에는 [[채제공]]을 격렬히 비난하는 상소를 올려 향리로 쫓겨난 일도 있었다. 외에도 지경연사, 형조판서 등을 지냈다. 이문원은 허례허식에 얽매이지 않은 것으로 유명한데 [[https://m.blog.naver.com/gang623/110096510871|이에 관련한 장난 괴수 이문원이라는 민간에서 전해지는 이야기가 있으니]] [[https://blog.naver.com/cim112/222295562039|재미로 보는 것을 추천한다.]] * 이정운 - 이조판서에 증직된 이징대의 아들이다. 1769년에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검열·정언·지평 등을 거쳐 1781년에 홍충도암행어사가 되고, 1784년 서장관으로서 사은사(謝恩使) 박명원(朴明源) 등과 함께 [[청나라]]에 다녀왔다. 그 뒤 승지 등을 지내다가 한때 안치되었고, 1796년 충청도관찰사, 이듬해 함경도관찰사, 1800년에 형조판서가 되었다. 문명이 뛰어났으며,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여담으로 아들 이조판서 이명적이 동래부사로 재직 당시 [[동래부]]에 관여하던 사람들이 그의 공덕을 기려 이명적 축제혜민비(李明迪築堤惠民碑)를 세우기도 하였다. * 이익운 - 형조판서 이정운의 동생이다. 1774년에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했다. 1801년, 경기도관찰사 때 주문모(周文謨)와 관련된 천주교신자 18인을 잡아 심문한 뒤 그 중 3인을 참형(斬刑)에 처하였다. 이후 대사헌과 이조판서 등을 지냈다. 시호는 정숙(靖肅)이다. * 이조원(李肇源) - 이민보의 아들로 1758년에 태어나 1832년에 죽었다. 앞에 서술되어 있는 동시대에 같은 집안 사람인 동명이인이 존재하므로 구분을 잘 해야한다. 장원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1820년 판의금부사를 거쳐 좌참찬이 되었고, 이듬해 하정사로 청에 파견되었다. 이 후 우빈객·예문관제학·병조판서·좌빈객·호조판서·이조판서·공조판서 등 현직을 두루 지냈다. 그러나 1827년 승지 이해청과 사간원과 사헌부가 1814년 [[순조]]의 병환이 위독했을 때 김기서·김기후 등과 반역을 도모했다고 탄핵하자, 봉조하로서 무고라고 소를 올렸지만 결국 [[흑산도]]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사후 참시당하였다. [[풍양 조씨]]계의 인물로 [[안동 김씨]]계와 맞서다가 끝내 희생당한 것이다. 후에 [[헌종(조선)|헌종]] 1년에 [[순원왕후|대왕대비]]의 명으로 신원되었다. 글씨를 잘 썼고, 특히 전각에 뛰어났다고 한다. * 이곤수 - 자는 성서, 호는 수재. 판서 이길보의 손자로 좌의정 이성원의 아들이다. 21세 때인 1782년 성균관 유생으로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을 거쳐 규장각대교가 되었다. 이후 시강원설서가 되었고, 1787년에는 [[황해도]]·[[평안도]] 양도의 어사로 나가 민정을 살피고 시정책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함경도관찰사로 부임하는 아버지 이성원을 따라가다가 병으로 요절하였다. 문재(文才)가 뛰어나 [[정조(조선)|정조]]에게 남다른 총애를 받았으며, [[정조(조선)|정조]]가 직접 호를 하사하기도 했다. 이에 이곤수가 요절하자 [[정조(조선)|정조]]는 몹시 애통해 하였다. 여러 편의 시문을 남겼으며, [[정조(조선)|정조]]의 말을 기록한 『일득성어록(日得聖語錄)』 등의 저술을 남겼다. 저서로는 『수재유고』 8권 3책이 있다. * 이존수 - 영의정 이천보의 손자로 1819년 대사헌·이조판서, 이듬해 공조판서, 1821년 예조판서·호조판서, 1823년 예문관제학·판의금부사·병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다. 1826년 함경감사 때에 조적의 고르지 못함을 바로잡는 오조변통책(五條變通策)을 강구하였다. 이듬해엔 우의정이 되어 수령 고과의 법을 엄하게 하고 족징(族徵)의 폐단을 근절할 것을 주장하였다. 1829년에 좌의정이 되어 포삼을 잠월하는 폐단을 막고, 망화정(望華亭)에 거주하는 백성들이 관속을 빙자해 도매하므로 이의 혁파를 주장하였다. 좌의정 재직 중에 죽었는데 명문가 출신으로 유배 하나 없이 벼슬길이 순탄했으며, 왕에게 직언하며 아첨하지 않았다. 시문에 능했다. 또한 이인화의 소설인 《영원한 제국》의 주인공 이인몽의 실제 모델이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 * 이명호 - [[조선]]의 [[천주교]] 순교자로 본래 이정운의 둘째 아들이었으나 이익운에게 입양되었다. 이명호의 이름은 [[정조(조선)|정조]]가 지어준 것으로 [[정조(조선)|정조]]는 뒤에 이명호의 자(字)도 친히 지어주기도 했다. 이를 보아 [[정조(조선)|정조]]가 이명호를 많이 아끼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명호가 [[천주교]]에 입교한 후 오로지 [[천주교]]의 교리를 실천하는 방식으로만 생활했는데 언행을 온순히 하고, 식사를 극도로 검소히 했으며, 기도와 성서 그리고 주일의 교우 활동만이 그의 유일한 삶의 방식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천주교를 사교(邪敎)로 보았던 이익운은 이런 아들을 크게 꾸짖고 온갖 말로 배교할 것을 위협했으나 이미 소용없는 일이었고,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끝까지 설득을 거부당한 이익운은 결국 이명호에게 스스로 죽으라고 사약을 드밀었고, 이명호가 이를 거부하자 사람을 시켜 붙들게 하고는 강제로 먹였다. 포졸들이 들이닥쳤을 때는 이미 이명호가 25세의 나이로 절명한 뒤로 그 옆에는 약사발이 뒹굴고 있었다고 한다.[* 이익운은 아들 이명호를 [[양평군|양평]]에서 장사를 지냈는데, 이익운은 유언으로 [[천주교]]를 믿지 말고, 이명호의 곁에 묻어 달라고 했다고 한다. 또한 이명호의 절명 뒤, 이익운은 중형 이승운의 셋째 아들인 이명건을 자신의 둘째 아들로 양자 들여 흔치 않게 아들 둘을 양자로 들이게 되었다. 또 이명건의 큰아들인 이원식을 이명호의 아들로 삼아 이명호의 가계는 긴 정성의 뒤에야 비로소 여느 집과 같은 안정된 모습을 갖추었다. 그러나 한국학자료센터를 보면 이원식은 이명발의 아들로 나온다. 즉 후술할 이명불과 이명호, 이명발 모두 동일 인물일 수도 있다.] 참고로 이명호는 이명불이란 이름과 자주 뒤섞인다. 이에 이명불은 이명호의 이명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연안 이씨 족보에 의하면 이명불은 이익운의 형 이정운의 장자로 기록되어 있으며, 이익운의 양자는 이명불이 아닌 이명호로 기록되어 있다. 즉, 서로 다른 인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송담유록」[* 이 기록에서의 이명불의 이야기는 이명호의 이야기와 정확히 일치한다.]과 「눌암기략」 등은 모두 이름을 이명호가 아닌 이명불로 적고 있다. 게다가 족보에선 이명불의 후대가 끊겼고, 일체의 기록이 말소된 점도 의문이다. [[천주교]] 측의 기록에는 이명호 요한으로 나오고, 1801년 10월 26일 순조실록 기사에도 이명호로 나와 두 사람이 혼동된 이유를 명확하게 알기가 어렵다. * 이약우 - 좌의정 이성원의 손자로 [[순조]] 10년에 진사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1835년에 대사헌이 되고, 그 뒤 이조, 병조, 형조, 공조, 호조의 참의를 두루 역임하였다. 1841년에 동지정사로 [[청나라]]에 다녀와서 경기도관찰사가 되었다. 1848년 형조판서에 이어 좌참찬으로 삼조보감찬집당상을 겸하고, 이어 예조판서에 올랐다. 그 뒤 청녕군에 봉해지고 공조, 이조의 판서, 판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헌종(조선)|헌종]]이 죽자 왕의 시장제술관이 되고, 예조, 공조, 형조의 판서가 되었다. 이후 지중추부사 겸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이약우는 [[순조]], [[헌종(조선)|헌종]], [[철종(조선)|철종]]의 권우를 입었고, 아래로 사류의 추앙을 받아 청요직을 두루 편력하였다. 또한 문장에 뛰어나 [[헌종(조선)|헌종]]의 시장을 쓰고, 이약우의 상소문은 명문으로 유명하였으며, 문사는 독자적인 경지에 이르러 경외감을 느끼게 하였다. 외에도 역학과 산수에도 정통했다. * 이가우 - [[헌종(조선)|헌종]]부터 [[철종(조선)|철종]]까지 13년 동안 [[한성판윤]]을 10회나 지내면서 [[조선]] 최다 [[한성판윤]] 역임자가 되었다. 이에 이가우를 ‘판윤대감’이라 불렸지만 그의 재임기간을 통산하면 1년 3개월 밖에 되지 않는다. 이후 [[철종(조선)|철종]] 대에 판의금부사를 거쳐 이조판서가 되었다. * 이순익 - 초명은 이구익(李九翼), 자는 유서(唯怜)·유서(攸怜), 시호는 문정(文靖). 이약우의 아들로 [[철종(조선)|철종]] 8년에 서울에서 정시 문과 병과로 급제한 뒤 그 이듬해 규장각 직각이 되었다. [[고종(조선)|고종]] 2년 홍문관 부제학이 되고 이듬해 성균관 대사성을 거쳐 이조참의를 여러 차례 역임하였다. 1875년에는 진하 겸 사은부사로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이조참판과 홍문관 부제학을 거쳐 형조판서와 공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어 예조판서가 되고, 대사헌·공조판서를 거쳐 1890년 2월 홍문관 제학에 임명되었다가 한성부판윤이 되었다. 그 뒤 다시 공조판서, 예문관 제학, 예조판서를 지냈다. 1891년 4월에 한성부판윤에 임명되었다. 1892년 공조판서, 판의금부사, 예조판서, 예문관 제학과 홍문관 제학을 지내고, 1894년에는 다시 형조판서가 되었다. 1897년 봉상시 제조를 거쳐 의정부 찬성에 임명되고 칙임관 1등에 서임되었다. 이듬해 중추원 일등 의관이 되고 흥선대원군의 상례에 지문제술관(誌文製述官)으로 차출되었다. 1899년 장례원경과 궁내부특진관이 되고, 1901년부터는 규장각 학사, 홍문관 학사, 궁내부특진관을 역임하였다. 1902년에 정1품 보국(輔國)에 올랐으며, 1904년과 그 이듬해에는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 일강관(日講官)을 지내기도 하였다. 또한 1906년에 홍문관 학사를 지냈으며, 칙임관 1등에 올랐다. 기로소에 들어갔으며,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 이조연 - 자는 경집, 호는 완서, 시호는 충정이다. [[서얼]] 출신이자 [[온건개화파]]의 중심 인물로 1880년에 사헌부감찰로서 개항 후 처음으로 파견되는 수신사 [[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이듬해 다시 수신사 조병호의 종사관으로 일본에 다녀왔다. 1882년, 문과를 병과로 급제하고, 이해 고선관으로 [[청나라]]에 가서 [[영선사]] 김윤식을 따라 톈진에 간 유학생과 공장들의 실정을 조사하였다. [[임오군란]] 때에 [[흥선대원군]]이 [[조선]]에 진입한 [[청나라]] 군에 의하여 [[청나라]]에 끌려가자 통리기무아문주사로 조영하의 종사관이 되어 [[청나라]]에 가서 [[흥선대원군]] 수금에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 또한 [[청나라]]의 제도를 본떠 군제개혁이 단행되자 친군영좌감독이 되고, 이어 참의교섭통상사무, 기계국총판, 혜상공국총판, 이조참의, 함경북도병마절도사 등을 지냈으며, 1884년에는 협판군국사무 겸 기계국총판을 지냈다. 그는 [[온건개화파]]였지만 친청정치행적으로 [[개화당]]으로부터 [[수구당]]이라고 지목을 받았고, 1884년 [[갑신정변]] 때 우정국사건이 벌어지자 우정국 개국 축하연에 참석했던 이조연이 국가대사가 벌어짐을 눈치채고 궐내로 들어가려던 중 [[민태호(조선)|민태호]], 한규직, 윤태준 등과 같이 개화당에 의하여 피살되었다. 후에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여담으로 윤태준과 [[중국]] [[상하이]]에 갔을 때 밤에 길거리에 나간 이조연은 길가에 떨어진 주머니를 발견하여 가져와서 그 안을 열어보니 100만냥의 가치로 되어 보이는 지폐 수천 원이 들어있었다. 이에 이조연이 자고 있던 윤태준을 깨워 이것을 가져가면 [[조선]]의 부자가 될 수 있을 것인데 윤태준의 생각은 어떻냐고 물어보자 윤태준이 이조연의 뜻대로 하라고 했다. 이에 이조연은 밤새도록 고민을 하다가 날이 밝자 대문 위에 전날에 수천 원의 지폐를 잃어버린 사람은 와서 찾아가라는 글을 써서 붙였고, 이에 돈의 주인인 영국인이 찾아와 "내가 듣기로는 동양에는 인물이 적다고 들었는데, 공처럼 훌륭한 분도 계십니까?"라며 돈을 찾아준 이조연에게 감사를 표한 후 사례금을 후하게 주었다. 그리고 이 일이 신문에 기재되어 온 천하에 알리게 되자 [[고종(조선)|고종]]은 크게 기뻐하며 이조연의 아들 이탁을 배천군수로 임명하였다. * [[이도재]] - 1848년 생으로 호는 심재, 운정이며 시호는 문정(文貞). 1882년 증광문과 급제생으로 [[이완용]], [[서재필]] 등과 동기다. 이듬해인 1883년 경상좌도 암행어사로 나가기도 했다.[* [[부산광역시]] [[기장군]]에 있는 어사암이 이때 유래되었다. 어사암은 1894년에 기장현에 있는 해창에서 양곡을 가득 실은 조운선이 부산포로 가다 이곳 앞바다에서 풍랑을 만나 침몰하는데 흉년으로 굶주리던 어촌 주민들은 잠수질하여 바다 밑에 흩어져 있던 곡식을 건져서 먹는다. 그러나 이 일이 현감에게 알려지며 주민들은 모두 절도 혐의로 기장 관아에 구금되고, 마을 집집을 수색하여 곡식을 모두 거둬 갔으며, 옥에 갇힌 주민은 가혹 행위로 죽기까지 했다. 이 일이 고종의 귀까지 들리자 이도재를 어사로 파견하여 볏섬 도난 사건과 고문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도록 했다. 어사가 온다는 소식을 접한 어촌 주민들은 기장 관기 월매로 하여금 자신들의 어려운 사정을 얘기하고, 관아에서 가혹 행위로 도난 물량이 많은 것처럼 허위로 꾸며 주민들의 재산을 수탈하려 했다고 말하게 했다. 이에 월매는 어사가 현장을 조사하기 위해 매 바위를 찾을 때 월매도 동행하여 춤과 노래를 선보였고, 어사는 흥에 겨워 '''‘천공경무물(天空更無物) 해활난위시(海闊難爲詩) 환구구만리(環球九萬里) 일위가항지(一葦可航之)’'''(하늘은 비어서 다시 형상하기 어렵고, 바다는 넓어서 시를 짓기 어렵네. 세상 구만리에, 한 조각 갈대배로 항해해 갈 뿐이라네)라는 시를 매 바위에 새겨 넣어 결국 이도재의 현명한 선택으로 절도 죄가 성립되지 않아 주민들은 무사할 수 있었다. 이에 고마움을 느낀 주민들은 1883년 생사단을 세워 비석에 시를 짓고, 이도재의 생일마다 축원을 올렸다고 전해진다. 당시 비석에 적은 시는 아직까지도 비석에 적혀 있어 당시 어민들이 이도재에게 느꼈던 무한한 고마움을 볼 수 있는데 그 내용은 '''‘우리 고을에 왜 이리도 늦게 오셨나, 그래도 하늘은 기필코 도우시네, 수 많은 폐단들을 모두 바로 잡으시니, 천추에 영원토록 기리오리다.’''' 이다.] 문무를 겸전해 [[갑신정변]] 때 진압군으로 참여한 그는 [[동학농민운동]] 때 전라감사로 나가 [[전봉준]]을 체포했다.[* 전라감사 재직 당시 섬사람들의 여러 고충을 해소시키기 위해 강진, 해남, 영암으로 흩어져 있던 섬들을 묶어서 섬사람들 공동체인 [[완도군]]을 신설하기도 했다. 이에 사람들이 이도재에 대한 고마움에 영세불망비를 고금도에 세웠다.] [[대한제국]]의 [[부장#s-2|부장(副將)]]으로서 군부대신에 임명된 후 학부대신, 외부대신, 내부대신, 농상공부대신, 철도원총재, 법부대신, 고등재판소재판장, 궁내부특진관, 의정부찬정, 귀족원경, 장례원경·시종원경, [[대한제국]] 중추원 부의장 등을 역임하였다. 1906년 8월에 그 동안의 공적으로 태극장(太極章)을 서훈받았으며, 1907년엔 수학원장이었던 이도재가 궁내부특진관에 임명된 후 칙임관 1등에 서임되었다. 후에 [[헤이그 밀사사건]]으로 일본이 강제로 [[고종(조선)|고종]]을 폐위하려 하자 반대했다. 그러나 같은 해 7월 총리대신 [[이완용]]의 모함으로 [[박영효]] 등과 나문정죄 당했고, 다시 시종원경과 칙임관 1등에 서임되었으나, [[조중응]]이 [[고종(조선)|고종]]의 양위식에 질병 등의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처벌할 것을 아뢰어 탄핵을 받았다. 1909년에 타계하자 [[순종(대한제국)|순종]]이 몹시 애통해하며 [[궁내부]]로 하여금 장례 용품을 넉넉하게 지원하도록 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